대한불교조계종 선본사
선본사는 한국불교 약사신앙의 대표적인 성지이지만, 아쉽게도 그 창건이나 연혁에 관한 내용은 거의 전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점은 우리나라대부분 사찰들이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선본사의 경우는 특히 심한 상태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선본사의 창건과 연혁을 정확하게 서술하는 것 자체 가 대단히 어려운 일임을 전제해 두며, 여기서는 현대 이후에 작성된 몇몇 자료를 근거로 하여 대강의 내용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현재 선본사 사중에서 신뢰하고 있는 창건설은 신라 소지왕(炤知王) 13년인 491년에 극달화상 (極澾和尙)이라는 분이 이 곳을 창건하였다는 내용이다.
정확한 문헌적 근거는 찾기 어렵지만 최근까지 이같은 극화상의 창건설이 유력하게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같은 창건설이 어떻게 해서 전승되기 시작했고, 또 근거가 될만한 자료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일부 자료에는 선본암중수기문(禪本庵重修記文)이라는 자료가 있으며, 여기에 극달화상의 창건설이 언급되어 있다고 밝한 바 있지만, 이 자료의 성격이나 현존 여부도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선본사의 정확한 창건 시기를 언급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무리한 일이 되겠으나, 여기서는 극달화상과 선본사 소재 유물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창건 시점을 유추해 보고자 한다.
우선 선본사의 창건주로 등장하고 있는 극달화상이라는 스님에 대한 검토이다.
이 스님은 이른바 정사류(正史類)에 해당하는 역사서나 주요 불교 문헌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선본사와 인접해 있는 팔공산 동화사(桐華寺) 관련 일부 문헌에 그 법명이 보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즉 극달화상은 동화사의 창건주로 일부 자료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조선불교선교양종제일수찰대본산경북달성군공산면동화사적비(朝鮮佛敎禪敎兩宗第一首寺刹大本山慶北達城郡公山面桐華寺跡碑)」라는 자료에 실려 있는 다음의 내용을 검토해 보기로 했다.
(동화사는) 생각컨대 극달존숙(極達尊宿)께서 부악(父岳)의 남쪽 기슭에 창건하고 유가(瑜伽)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때는 신라 소지왕 15년인 계유(癸酉)년 이었다.
이 사적비는 1931년에 김정래(金鼎來)라는 분이 찬술하였으며, 여기서 동화사는 신라 소지왕 15년, 493년에 극달화상이 창건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사실 동화사의 창건에 관한 내용도 몇가지 설이 함께 제기되어 있는 상태이다. 극달화상의 창건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보는 사람들은 흥덕왕(興德王) 7년인 832년을 동화사의 실질적인 창건연도로 보고 있디고 하다. 즉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심지계조(心地繼組)> 조에 실려 있는 내용으로 보아 동화사의 실질적 창건주는 심지(心地)라는 스님이며, 그 창건시기는 832년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혼동도 결국 극달화상이라는 스님의 행장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여하튼 동화사는 지금까지도 극달화상을 창건주로 인식하면서 그 분의 영정을 소중하게 봉안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록 행장은 부명치 않지만 극달이라는 법명을 지닌 스님은 이렇게 팔공산의 주요 사찰 창건주로 지금까지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극달화상은 어느 시기에 생존하였던 인물로 보아야 할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선본사 일대에 현존하는 몇가지 유물 자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확한 시기 산출은 어렵겠지만, 이들 유물의 연대 추정을 통해, 선본사의 창건시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본사의 유물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선본사삼층석탑(禪本寺三層石塔)>(경상북도유명문화재 제115호)이다. 운이 석탑은 8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팔공산에 산재하고 있는 석탑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주목되는 유물이다. 따라서 이 석탑만 놓고 본다면 선본사는 늦어도 8세기 전반 이전에 가람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으며, 팔공산의 여러 사찰 가운데서도 매우 이른 시기에 창건된 사찰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선본사의 가장 중요한 유물인 이른바 '갓바위 부처님'도 석굴암 불상보다 이른 시기인 8세기 초반 이전에 이미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갓바위 부처님'의 조성시기를 보더라도 역시 선본사의 창건은 8세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확신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 선본사와 동화사의 창건시기로 등장하고 있는 491년, 493년은 어느 정도의 신뢰성을 지니고 있는가?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신라 왕실에서 불교를 공인하는 527년 이전의 일이므로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신라 일부의 사람들에게 불교가 전파되고 있긴 하였지만, 불교의 공인 이전에 사찰을 건축하고 불상과 탑을 조성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이다. 따라서 선본사의 창건 시점은 6세기 중.후반부터 8세기 이전이라고 일단 가정할 수 있으며, 창건주인 극달화상도 그 시기에 활동했던 스님이 아닐까 한다. 아울러 지금 동화사에 봉안 중인 극달화상의 진영에 '公産開祖極達和尙之眞影' 즉 '공산의 개조' 라는 표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스님은 불교가 팔공산에 자리잡는 과정에 있어 가장 큰 공헌을 하였던 인물로 짐작된다.
매우 이른 시기부터 가람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던 선본사의 역사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거의 알려진 내용이 없다. 다만 「선본암중수기문」이라는 자료에 의거했다는 몇개의 연혁이 밝혀져 있으며, 여기서는 이를 중심으로 간략하게나마 선본사의 연혁을 구성해 보기로 하겠다.
연도 주요사항 491년(신라 소지왕3)극달화상이 선본사를 창건함 638년(선덕여왕 7)의현스님이 관봉의 약사여래좌상(갓바위 부처님)을 조성함 1614년(조선 인조 19)수청스님이 사찰을 중건함 1766년(영조 41)기성화상이 사찰을 중건함 1802년(순조 2)일암당스님을 증명으로 하여 국성스님등이 신중탱화를 조성함 1820년(순조 20)운암화상이 사찰을 중수함 1877년(고종 14)낙허화상이 사찰을 중수함 이후 월인화상도 사찰을 중수함 1957년사찰을 일부 수리함 1962년10월 2일자 <동아일보>에 '갓바위 부처님'이 소개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함1985년극락전을 중창하고 선방 및 산신각을 신축함 1990년칠성각을 개축함 1994년10월 대한불교조계종 직영사찰이 됨
이상이 현재까지 알려지고 있는 선본사 역사와 관련한 내용들이다. 491년의 창건설이 안고 있는 문제점과 창건 시기에 관계된 내용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아울러 '갓바위 부처님'이 조성되었다고 하는 638년은 뚜렷한 명문(銘文)이나 문헌적 근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설화의 내용에 근거한 것임을 밝혀둔다.
위의 연혁에서 선본사의 중창주로 등장하고 있는 수청(秀廳).기성(箕成).운암(雲岩).낙허(樂虛).월인(月印)스님 등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1802년에 조성된 신중탱화는 확실한 내용의 화기(畵記)를 포함하고 있어 주목된다.또한 화기 가운데는 '...奉安千此庵秩'이라는 글귀가 포함되어 있어 이 불화가 선본사에서 조성된 후 '갓바위부처님' 아래 지금의 전각으로 옮겨져 봉안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19세기 초반의 가람 구조도 지금과 유사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또 화기 가운데의 본암질(本庵秩)에 있는 '조실정우(祖室挺玗)'라는 글도 눈에 띈다. 약사신앙의 성지인 선본사의 역사가 이렇게 소략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큰 안타까움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도 선본사의 역사를 찾아내기 위한 작업은 계속되어야 하겠지만, 문헌자료의 한계를 감안한다면 선본사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발굴조사 등의 고고학적 조사가 시급히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갓바위 부처님이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끈 것은 지금으로부터 그다지 오래된 일은 아니다. 물론 그전부터 계속 있어왔던 불상이지만 조선시대를 지나오면서 한 때 세상 사람들의 머리에서 잊혀졌고 그것은 근처 부락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1960년대 초반에 석굴암이 본격적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되면서 앞서 말한 군위 삼존불이 발견되어 이른바 '제2의 석굴암'으로 불렸는데, 팔공산도 함께 본격적으로 조사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때 갓바위 부처님이 발견. 조사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받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2년 당시의 신문을 보면 갓바위 부처님의 발견을 나름대로 특필(特筆)하고 있는데, 그때의 신문 기사를 보면 당시의 발견에 대한 흥분이 그대로 읽혀진다.